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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본이 가장 두려워했던 푸른 눈의 영국인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어니스트 베델"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총 대신 펜으로 조선의 독립을 외친 외국인 독립 운동가였습니다.


"나 이토의 백마디 말 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는 말로 조선 총독부 이토 히로부미가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자 이기도 합니다.

푸른눈의 독립운동가

▶1872년 11월3일 영국의 브리스틀에서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베델의 한국 이름은 배설(裵說)로 16살때부터 32살까지 일본에서 살다 1904년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종군 기자 자격으로 한국의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러일 전쟁에 관련된 기사를 쓰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한국의 현실을 본 베델은 양심상 도저히 글을 적을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본사의 지시는 일본에 우호적인 친일 기사만 써야 했기 때문에 그는 이를 거절하고 파견 하루만에 본사로 부터 해고를 당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

<어니스트 베델과 양기탁>

해임후 한국을 떠나지 않고 우국지사 양기탁과 함께 1904년 7월18일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영문)을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사전 검열을 피하고자 어니스트 베델의 이름으로 신문을 발간 하고 또 치외법권의 이점을 살려 명성황후 시해사건, 항일무장 투쟁 보도, 헤이그특사 파견보도, 국채보상운동 전개, 을사조약 무효 기사 등 그동안 실지 못했던 기사들을 실어 일본의 만행을 온세상에 알리는데 노력했습니다. 

▶이 당시 유일하게 일본의 검열을 피할수 있었던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발행부수 1만부를 넘는 최대 신문사로 발돋음 하게 되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일제의 탄압

자꾸만 커져가는 대한매일신보를 볼수만 없었던 일본은 그를 탄압하기 시작 했습니다. 동맹국이던 영국에 압력을 넣어 1907년 10월과 재판을 서게 합니다. 하지만 추방에는 실패, 이듬해 5월 다시 제소하여 3주간의 금고형과 함께 피고인 1,000달러 보증인 1,000달러씩 벌금을 물게 됩니다. 이후 상하이에 호송되어 3주간 금고 생활을 한 후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어니스트 베델"의 서거

대한 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섰던 베델은 1909년 5월1일 심장병으로 죽음을 맞이 하게됩니다. 그의 나이 37세로 젊은 나이에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 베델은 죽으면서 곁에 있던 양기탁의 손을 꼭 잡으면서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고 전했습니다. 이후 1968년 그동안의 노고가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지금은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